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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취된 결론, 지워진 전제
지워진 전제
서울중앙지방법원 서관 11층, 부장판사 강민우의 사무실은 오후 5시가 넘어가자 유난히 더 어두워졌다. 책상 위에는 캐비닛에서 갓 꺼낸 두꺼운 공판 기록과 증거서류 뭉치들이 성벽처럼 쌓여 있었다.
민우는 모니터 화면에 띄워진 판결서 초안을 응시했다. 화면 가장 상단, 피고인의 이름 옆에 적힌 판결 요지는 이미 며칠 전부터 단 한 글자도 바뀌지 않은 채 고정되어 있었다.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한다.”
그것은 이 재판의 종착지이자, 동시에 출발지였다.

문이 열리고 배석판사 이지윤이 한 아름의 서류를 안고 들어왔다. 임관한 지 겨우 3년 차인 그녀의 눈밑은 짙은 피로로 그늘져 있었다. 지윤은 민우의 책상 맞은편에 서류를 내려놓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장님, 피고인 서진우의 태블릿 PC에서 복구된 이메일 기록을 다시 확인해 보았습니다. 대기업 화학 공장의 미허가 독성 물질 방출에 대한 고발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공익신고가 명백합니다. 검찰이 기소한 ‘부정경쟁방지법상 영업비밀 누설’ 및 ‘업무상 배임’은 구성요건조차 성립하지 않습니다. 대법원의 기본권 보장 판례 흐름을 보더라도 이건 무죄로 가야 합니다.”
민우는 돋보기안경을 천천히 벗어 책상 위에 놓았다. 안경테가 나무 책상과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이 판사.”
“예, 부장님.”
“자네는 아직도 판결문을 쓸 때, 전제에서 출발해 결론으로 나아간다고 믿나?”
지윤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입증해야 할 결론을 이미 참이라고 가정하고 논리를 끼워 맞추는 것이 어떻게 사법 정의가 될 수 있습니까?”
지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민우는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정의? 이 판사, 이 사건은 단순한 형사 사건이 아니야. 피고인이 폭로한 대기업의 생산 라인이 멈추면 국가 신용도와 수출 지표가 흔들려. 법원장께서도 지난 주말 사석에서 우려를 표명하셨네. ‘사법부가 사회적 파장을 고려하지 않고 법조문 자구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지. 이 재판의 결론은 이미 사법부와 이 사회의 무언의 합의에 의해 선취되어 있었던 걸세. 자네와 내가 할 일은, 그 선취된 결론이 아주 ‘합리적이고 합법적’으로 보이도록 정교한 껍데기를 씌우는 일뿐이야.“
조각(阻却)가들의 법정
지윤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자판을 두드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최근 언론에서는 사법부의 이른바 ‘주문(主文) 맞춤형 판결’을 비판하는 기사가 쏟아지고 있었다.
[단독] 법원, 핵심 증거 배제하고 ‘결론 정해둔 짜맞추기 판결’ 논란… 상급심 판례도 무시
학계와 법조계 일각에서는 판사가 이미 마음속으로 유죄 혹은 무죄라는 답을 정해놓고 법리를 왜곡 적용하는 ‘결론 선취’ 현상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최근 대법원 판례의 흐름조차 거스르며 자의적 해석을 내놓는 하급심 판결들이 늘어나며 국민적 사법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기사 속 구절들이 송곳처럼 지윤의 심장을 찔렀다.
민우가 지윤에게 건넨 판결서 초안은 그야말로 ‘결론 선취’의 정수였다.
검찰 측 증인의 진술 중 피고인에게 유리한 부분은 완전히 누락되었고, 대기업 측의 일방적인 피해 주장 액수만이 고스란히 사실로 인정되어 있었다. 더욱이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를 제한하는 판단을 내리면서도, 그 구체적인 헌법적 한계나 비례 원칙에 대한 검토는 생략되어 있었다.
“이건 재판이 아니라 조각(阻却)이잖아.”
지윤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원하지 않는 모양을 깎아내고, 오직 원하는 상(像)만을 남기는 작업.
법대(法臺) 위에서 엄숙한 법복을 입고 앉아 있는 판사들이 실은 진실을 탐색하는 항해사가 아니라, 사전에 설계된 도면에 맞추어 사실과 법을 깎아내는 기술자에 불과하다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지윤은 참을 수 없어 다시 민우의 방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손에 두꺼운 형사소송법 주석서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문을 들고 있었다.

“부장님, 만약 우리가 이렇게 명백한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기존 판례의 확립된 해석까지 뒤집어가며 판결을 쓴다면, 이는 단순한 오판이 아닙니다. 최근 국회에서 통과 여부를 두고 논쟁 중인 ‘법왜곡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민우의 눈빛이 순간 예리하게 빛났다.
“법왜곡죄라니. 판사의 사법적 판단을 형사 처벌하겠다는 해괴한 법안을 감히 여기서 입에 올리나?”
“의도적으로 법령을 오적용하고 증거를 취사선택해 특정인에게 불이익을 주는 행위는 법치국가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범죄입니다. 사법부의 독립은 법관이 법에 따라 양심껏 판결하라고 준 특권이지, 결론을 정해두고 법을 비틀라고 준 면죄부가 아닙니다!”
지윤의 반박에 민우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창밖으로 보이는 대법원 청사를 바라보며 차분하지만 묵직한 어조로 말했다.
“이 판사. 법이란 무엇인가? 고정불변의 진리인가? 아니네. 법은 사회적 타협의 산물이며, 사법부는 그 타협을 유지하는 최후의 보루야. 때로는 거대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한 개인의 억울함 정도는 감내해야 할 때가 있네. 우리가 만약 피고인 서진우에게 무죄를 선고한다면, 이 땅의 모든 대기업 내부고발자들이 우후죽순 들고일어날 것이고 기업의 기밀 관리는 마비될 걸세. 그것이 자네가 원하는 ‘사무치게 올바른 세상’인가?”
“그건 사법부가 입법부나 행정부의 역할을 대신하겠다는 오만입니다. 우리는 법률가이지, 통치자가 아닙니다.”
“아니, 우리는 사법 통치권자이기도 하네. 판결문이라는 공식 문서를 통해 사회의 가치관을 강제하니까. 자네가 무죄 의견을 고집한다면 소수의견으로 남기게. 합의부의 다수의견은 이미 유죄로 결정되었네.“
선고, 그리고 남겨진 것들
선고 기일 당일.법정 안은 취재진과 유가족, 그리고 피고인 서진우를 지지하는 시민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민우는 무거운 법복을 걸치고 법대 중앙에 앉았다. 그의 좌우에는 이지윤 판사와 우배석 판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민우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단호했다.
“판결을 선고하겠습니다.”
그가 판결문의 ‘이유’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법정 안에 모인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지윤은 고개를 숙인 채 피고인석의 서진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낡은 양복 소맷자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사법부가 자신을 지켜줄 최후의 정의라 믿고 법정에 섰을 것이다.
민우의 낭독이 계속되었다.
“…피고인은 공익적 목적을 주장하나, 그 수단과 방법의 상당성을 결여하였으며, 유출된 자료의 기밀성을 고려할 때 기업에 심대한 타격을 입힌 점이 인정되므로…”
지윤의 귀에는 민우의 음성이 거대한 사기극의 독백처럼 들렸다.
그가 읽어 내려가는 구절들은 어제 지윤과 함께 논쟁하며 억지로 짜맞춘 ‘선취된 결론’의 파편들이었다.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엄격해야 할 유죄의 증명은 간데없고, 오직 피고인의 행위를 유죄라는 틀에 가두기 위한 자의적인 수식어들만이 법정을 가득 채웠다.
“…따라서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하며, 현장에서 법정구속합니다.”
민우가 봉을 세 번 두드렸다.
땅. 땅. 땅.
법정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서진우의 가족들이 오열하며 법대를 향해 소리쳤다.

“이게 무슨 재판입니까! 법을 정해놓고 짜 맞춘 거 아닙니까! 법관의 양심은 어디로 갔습니까!”
법원 경위들이 방청객들을 제지하는 동안, 민우는 흔들림 없는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단 한 번도 피고인석이나 방청석을 돌아보지 않은 채, 신속하고 기계적인 걸음으로 법정을 빠져나갔다.
지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법대를 내려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납덩이를 매단 듯 무거웠다.
에필로그
몇 달 후, 이지윤 판사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녀의 책상 위에는 법원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정리한 공판 기록들이 고요히 놓여 있었다.
그녀가 떠난 판사실 창밖에는 여전히 정의의 여신상이 저울과 법전을 든 채 서 있었다. 눈을 가리지 않은 한국의 정의의 여신상.
법원은 여전히 매일 수백 건의 판결을 쏟아내고 있었고, 그 판결문들의 화려하고 빈틈없는 논리 뒤에는 여전히 ‘먼저 쓰인 결론’들이 도사리고 있을 터였다.
지윤은 법원 청사 문을 나서며 멀리 보이는 서초동의 가로수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비로소 사법부의 거대한 성벽 뒤에 가려진 진실의 무게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사법이 스스로 논증의 출발점을 속이고 결론을 먼저 선점해 버릴 때, 그 법이 수호하는 것은 정의가 아닌 강자의 안녕일 뿐이라는 서글픈 깨달음과 함께.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에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법부의 ‘결론선취’ 판결은 법치(Rule of Law)를 가장한 인치(Rule of Man)이자, 사법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가장 정교한 오용이다. 법관이 법적 추론의 출발지점과 도달지점을 바꾸는 순간, 사법 정의의 저울은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원칙은 재판 절차에서 가장 강력하게 고수되어야 한다. 사법부는 스스로가 ‘결론을 정해두는 권력’이 아닌, ‘질서 있는 이성적 논증의 중재자’임을 자각하고 뼈를 깎는 사법 윤리 확립과 엄격한 논증 의무 수호에 나서야 할 것이다.
지난 2024년 12월의 혼란 속에서 치러진 재판들은 담당 재판장의 성향에 따라 결과가 요동치는 모습을 보였다. 사법 정의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이러한 현상은, 사실상 재판 시작 전부터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짜 맞추기식 판결을 내리는 ‘결론선취’의 부정적 단면을 그대로 드러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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